재벌과 엘리트 스포츠의 힘

카테고리 : 잡담  |  작성일자 : 2008. 4. 24. 19:01  |  작성자 : 점프컷
핵심은 빠트려 버린 삼성 쇄신안

이건희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고, 아들인 이재용 전무도 해외현장 경험을 쌓는 등 나름 파격적인 쇄신안을 내놓았습니다.

언론에서는 충격적이라고 표현하고, 국민들 중 상당수도 이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건 그룹의 지배구조인 순환출자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순환출자는 재벌이 회사돈으로 지분이 적은 재벌 총수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후진적인 소유지배구조입니다.

이번 쇄신안은 삼성에 쏟아지는 도덕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한 쇄신안으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도덕성 문제가 불거져 나오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인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쇄신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은 하겠다. 그러나 지주회사로 전환은 시간을 두고 좀 더 검토해보겠다"는 식으로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언급조차 없으면 여론의 못매를 맞을 수 있으니 최소한의 립서비스를 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중앙집권식 그룹 경영의 효율성

이건희 일가의 비리에 대한 비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만(막연한 도덕성은 요구하지만), 재벌일가가 그룹의 경영권을 강하게 틀어쥐고 있는 지배구조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오히려 이런 지배구조를 찬성하는 쪽이 많습니다.

왜?

그게 효율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게 한국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역시 중앙집권식 의사결정 체계를 선호합니다. 밑에서 말이 많으면 골치아파 합니다.

이건 재벌뿐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름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블로고스피어 조차도 블로그 관련 행사 비판 좀 하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는 소리가 나오죠. 추진하는 쪽에 힘을 실어주자는 목소리가 문제를 지적하고 좀더 나은 방법을 고민해 보자는 목소리보다 항상 높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시장 진출하자고 했을때 밑에서 이런 저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오면 어떻게 일이 성사되었겠냐?고 합니다. 일견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희 일가의 비리와 후진적인 기업문화 역시 이런 지배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국가대표 선수 삼성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삼성을 칭찬할때 빠트리지 않는 것이 이건희 회장의 결단력입니다. 당시 누구도 안된다고 했을때 이건희 회장이 과감하게 반도체 시장에 진출하여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냈습니다.

이런 성공신화를 대다수의 국민들은 좋아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세계 무대에 도전해서 거두어온 성과에 감명을 받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삼성의 부도덕한 면을 아무리 공격해도 삼성은 한국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대표 기업이기 때문에 삼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무도 바라지 않습니다.

요런식의 기사가 계속 나오면 결국 원위치로 되돌아 갑니다. 그걸 아니까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으로 이런 과감한 쇄신안을 발표할 수 있습니다. 지배구조에 흔들림만 없으면 얼마든지 회사돈 개인주머니처럼 이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뜬금없이 엘리트 스포츠 이야기

우린 왜 삼성을 응원하는가?

소비자 입장에서 삼성을 딱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만 봐도 삼성 제품이 일본 제품에 비해서 아주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제품들에 비해서 시장에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이렇듯 소비자로서 삼성을 바라보는 태도는 냉정하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소비자가 아닌 국민의 한사람으로 돌아서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국가경제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해외시장 개척을 통하여 국익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삼성은 단순히 어정쩡한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자랑거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게 특유의 한국적인 정서입니다.

우리나라가 인구는 많지만 스포츠 인프라가 부족하고, 입시경쟁에 내몰리기 때문에 스포츠 강국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인기있는 프로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 야구만 봐도 고교야구팀의 숫자가 얼마되지 않고, 야구장을 여유있게 찾을 수 있는 국민들이 많지 않습니다.

비인기 스포츠는 더 심하구요. 그러나 올림픽같은 국제경기에서는 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과시합니다. 비록 스포츠 강국의 인프라는 부족하지만 체계적이고 탄탄한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올림픽 나가서 금메달 따오면 국민들은 환호하고, 역시 우리 민족은 집념과 근성이 뛰어나다고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 이면에는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의 비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트 스포츠의 그늘을 조명하면 국민들은 애써 외면할려고 합니다. 만일 누가 엘리트 스포츠를 비판하거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으면 남의 성공에 왜 초를 치느냐는 반응이 우세하죠. 이렇듯 성공신화는 감동이라는 정서적인 반응을 수반하기에 합리성이 끼어들 여지가 적습니다.

냉정하게 이야기 하면 "금메달 따오는데 왜 국민세금으로 연금을 주느냐?"고 따질만도 합니다. 그 돈으로 국민건강 증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사회체육 시스템에 지원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사회체육 시설이 형편없이 낙후되어 있죠. 그러나 올림픽 메달 수상자에 대한 연금을 사회체육으로 돌리자는 주장은 왠만큼 간댕이가 붓지 않은 이상 하기 힘듭니다. 이런 주장이 아무리 합리성을 갖춘다고 해도 국민적 정서에 부딪히기에 한없이 무기력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몇개 안되는 대기업이 세계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나, 스포츠 인프라가 부족한 환경에서 기적적인 성적을 올리는 모습이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수를 위해서 다수를 희생해도 좋다는 국민적인 동의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이건희 일가의 비리를 지적하는데도 이런 합리성이 결여된 국민적인 정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국민적인 정서는 특별히 비리에 관대한 국민이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입니다. 그러므로 삼성 문제를 비판할때는 이런 현상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두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건희 일가와 삼성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비판할 것(국민적인 정서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국민적인 정서 자체를 바꿀려고 시도할 것.

전자를 고려하면 삼성 불매운동 같은건 효과적인 전략이 안되구요, 후자는 쉽게 손대지 못하는 분야죠.
Posted by 점프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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